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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읽다.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

송혜근 저

생각의 나무

2001년 2월

300면

마치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을 읽는 듯한 청결하고 우아한

문체와 소재들로 가득 찬 소설집이라는 느낌이다.

감각적이며 탐미적이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정적이며 고요하면서 소용돌이 치는 듯한 내면을 표현한..

6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Contents

1. 행복, 머무르지 않는
2. 누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죽였는가
3.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
4. 거울이 놓인 방
5. 무도회의 수첩
6. 먼 옛날부터 당신을 기다렸다

Quotation:

슬프게도 이제 시작은 없소. 내 앞에는 한 가지 길만이 있소.

난 그 길을 인도할 죽음의 사자를 기다릴 뿐이오.

이제 마지막 작별을 고할 시간이오. 아침에 찻길의 먼지가

시커멓게 쌓인 병원 창가에 참새가 날아와서 한참 지절대다 갔소.

내 눈 앞에 우리 정원에 있던 프린세스 나무와

그 나무에 걸터앉아 순을 뜯어먹던 새들,

당신이 서서 바라보던 모습과

중얼거리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소.

- 행복, 머무르지 않는

아줌마는 이 세상이 잘못돼 간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가령 예를 들면요, 아까 자선단체에서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려고 할 때도 경찰이 법을 위반하는 거라고 잡아가려고 했잖아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려면 위생시설을 해놓고 허가를 받으라는 거지요.

한편에서 먹지를 못해 굶주리고 있는데,

고맙게도 그들은 그 사람들 뱃속에 대장균이 들어가

혹시 배탈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거예요.

- 누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죽였는가

그녀는 테이블 위에 하릴없이 놓여있던 손을 살며시 배 위로 가져갔다.

그 뱃속에는 그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뱃속의 아이는 떼어낼 것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번만큼 그녀 스스로

단호한 결정을 내렸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여자가 싫었다.

특히 그녀 같은 순종적인 여자가 싫었다. 뱃속의 아이가 딸이고,

그것도 자신을 닮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

옷은 자기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신과 만나기 위한 장치야.

아름다운 나와 만나기 위해선 긴장을 해야하고,

긴장을 하기 위해선 옷이 필요하단다.

생일,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 발렌타인 데이 그리고

이런저런 모임날이 되면 며칠 전부터 마사지를 하고,

당일이 되면 아침부터 정성스레 목욕을 하고,

머리를 손질하고 잘 세탁된 옷들을 꺼내 입지.

마음에 흡족한 내 모습이 됐을 때의 기분은

예술가가 무대에 섰을 때 느끼는 흥분을 닮았을 거야.

- 거울이 놓인 방

보트가 고요한 호수 표면을 흔들면서 미세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이 술에 취해 달아오른 수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바람은 수십 년 동안 그녀 집 주위를 맴돌며

아침마다 호수를 향한 침실 문의 커튼을 살라이던 바람이었따.

그 바람은 그날 아침에도 그녀 침실의 커튼을 흔들어댔었다.

바람 속에는 소리들이 숨어 있었고,

수지는 바람 속에 고여있는 비밀스런 그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 무도회의 수첩

그의 내부에서는 안타까운 어떤 것이 자라나고 있었다.

저토록 미세하게 여자의 세포를 떨도록 만드는 기억의 소립자들,

그것들은 영원히 그가 공유할 수 없을 거라는

깨달음에서 생기는 두려움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여자가 안고 있는 비밀에 대해

폭력적인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다.

- 먼 옛날부터 당신을 기다렸다

Tirami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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