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잇(post it)>
김영하저
현대문학
2002년 9월
241면
표지 참 촌스럽다.
얼마전 생일이 지난 착한! 친구에게 생일 선물을 주려고 뭘 받고 싶냐 물었더니
(사실 생일 선물을 당사자에게 묻는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지만..)
나보다 7~8살쯤 어린 그 친구는 냉큼 책을 사달라는 것이다.
나이도 어린게 칙칙하게 생일 선물로 책이나 받고 싶어 하나고 했더니.
그래도 책이 제일! 좋다고 하여..
여기 저기 둘러보아 결국 책 세권을 골랐다.
(사실 여기저기 둘러본것도 아니고..루루님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책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세 권중 한 권은 품절이고 두권이 지난주에 도착했다.
사실 내용이 뭔지도 모르는 책을 선물이랍시고 냉큼 건내주기가 좀 그래서
얼른 한 권을 펼쳐 들었다.
제목으로나 평으로나 그나마 가벼운 책이라는 느낌에 금방 읽을수 있을것 같았기때문이다.
보시다시피 책표지도 촌스럽거니와 크기도 80년대 중학교 교과서 크기다-_-;
하지만 내용은 전혀 촌스럽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작가가 겪은 주변의일들을 재미있게풀어낸 산문집이다.
Quotation :
카메라
그 후 천덕꾸러기가 된 디지털 튜너는 아무런 물리적, 전기적 충격을 받지 않았는데도 덜컥 고장을 일으켰다. 그가 아마 휴대폰이나 카메라처럼 나돌아다닐 수 있었다면 아마 이꼴저꼴 안 보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반면에 사랑받는 황학동표 튜너는 오늘도 아무 고장없이 FM방송을 술술 읊어대고 있다.
조선왕조 주식회사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더욱 신이 나 떠들어댔다.
"우리 고모가 상궁인데 어제 입궐했다가 주상을 뵈었다지 뭐야.' 이런 말도 할 수 있게 되는거지.
물론 자기 삼촌이 별감인 놈도 있겠지. 통역 상궁, 웹디자이너 별감 같은 직업도 생길테고말야."
삼각관계
당신은 면도날을 사랑하고 면도날은 털을 사랑하고 털은 당신을 사랑한다. 이 기묘한 삼각관계는 어쩌면 이렇게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털을 미워하고 털은 면도날을 미워하고 면도날은 당신을 미워한다고. 이 삼각관계의 결과로, 면도날은 하루하루 이가 빠지면서 무뎌지고 당신은 늙어가고 수염은 굵고 무질서하고 꼴사납게 자라난다. 마지막 순간, 당신이 저세상으로 떠나가고서 면도날도 버려지고 당신 얼굴에 흙이 덮힐 때, 털은 당신 몸에 남아있는 모든 양분을 거름 삼아 며칠은 더 자라난다. 지난 세월 내내 자신을 증오했던 당신이라는 사람이 남긴 모든 것을 다 소모하면서.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시라. 당신은 털인가 면도날인가 아니면 털을 깎는 자인가.
눈사람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일이야 무슨 일이 있겟는가. 아무 일도 없지, 아무일도 없다는게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은 낭비이며 사치이며 한가한 감정놀음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나 자기는 전혀 사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잔인한 자들은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다.
'그냥...'으로 시작하는 대답을 기어이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말하는 자를 한심하게 만드는 놀음을,그들은 즐긴다.
"눈이 많이 와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찬란한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는 은전이라도 베풀듯,
그것마저도 아깝다는 듯, 피식, 웃어주고는 '춥다'는 말만 여러 번 하다가
"너도 이제 집에 가"라는 말과 함께 자기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를 기다리느라 만든 눈사람도 녹고 그 모든 기억들도 하라지고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만 남았다.
개
나는 개가 너무 좋다. 길 가다가도 개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러고 보니 아내도 개띠다.
레너드 코헨
당신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한 독자가 내게 말했다.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를 들으면서는 자살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물었다. 왜죠? 그 다음 곡이 〈Take This Waltz〉이기 때문이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 그래서요? 왈츠를 들으면서는 팔목을 그을 수가 없습니다. 왈츠는 삼박자니까요.
산울림
대학 입학시험을 보고 나서, 미안하다, 나는 돌연 그녀와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 한 달 후, 그녀가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촛농으로 밀봉한 편지 안에는 달랑 김수영의 시 한 수만 적혀 있었다.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내 평생 최초로 시적 에피파니를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도 어렵던 김수영의 시가 단박에 이해되었고 동시에 소름이 저르르 끼쳤다. 나는 시는 아름다운 거라고 배웠다. 그런데 몇 줄의 시가 저렇게 한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다니! 그러니까 그날 나는 비로소 시의 현대성에 눈을 뜬 셈이었다. 나는 김수영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가끔 그 시집을 들춰본다. 그러면서 그때 그 친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엉뚱하게 소설가가 되어버린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가끔 궁금해 한다.
포스트잇
아무 흔적 없이 떨어졌다 별 저항 없이 다시 붙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들. 여태 이루지 못한, 내 은밀한 유토피아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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