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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논란' <청연>을 옹호함 <청연>을 변호한다

'친일 논란' <청연>을 옹호함 <청연>을 변호한다
[필름 2.0 2006-01-16 19:40]


100억 원에 육박하는 제작비와 한국영화 최초의 본격적인 항공 촬영, <소름> 윤종찬 감독의 복귀작 등, 적지 않은 화제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청연>이 전혀 엉뚱한 화제로 좌초하고 말았다. 영화 소재이자 주인공인 박경원의 친일 행적을 둘러싼 친일 영화 논란이 그것이다. <청연>은 친일의 혐의를 쓰고 이렇게 날개를 접어도 좋을 매국 영화인가? 은 망국적 친일 영화로 오해받고 있는 <청연>을 옹호한다.

지 금 <청연>의 운명은 천국에서 지옥으로의 하강 비행을 감행한 박경원의 최후와 같아 보인다. '일만친선 황군위문 연락비행'이라는 명분 하에 40여 분의 짧은 시간 동안 비바람을 헤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박경원의 '푸른 제비호' 마냥 <청연>은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 허망하게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윤종찬 감독의 작가적 야심이나 박경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끌어내고자 했던 긴요한 주제 의식, 비행 스펙터클 장면이 거둔 기술적 성취 등은 담론의 테이블에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다.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6위라는 재앙에 가까운 성적으로 출발한 이 영화는 개봉 3주차에 접어들면서 기억에서 사라지는 회생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비상 직전, 푸른 제비의 날개를 꺾는 데 일조한 것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진 궤도를 이탈한 친일 영화 논란이었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박경원에 대한 친일 시비는 10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와 3년간의 제작 기간 동안 심혈을 기울인 거대 블록버스터영화를 작품의 내적 동력과는 무관한 인터넷 게시판용 논쟁으로 탈각시켜버렸다. <청연>을 둘러싼 친일 논쟁은 이 영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보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논란의 공과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개봉 10일 전 진보 언론을 자처하는 한 인터넷 매체에 '제국주의의 치어걸, 누가 미화하는가'라는 제하의 기사가 게재됐다. 박경원의 친일 행각을 고발하며 이를 <청연>의 친일 의혹으로 연결시킨 그 기사는 '친일파로 의심되는(박경원이 친일파인가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분분하다) 역사적 인물을 다룬 영화=친일파 영화'라는 어리둥절한 도식을 창조해낸다. 그 글의 작성자가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공인된 권기옥 여사의 평전을 집필 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친일 시비로 비화된 후 문제의 기사에 자료를 제공한 학자(그는 박경원의 평전을 집필한 저자였다)가 자기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지만 화제의 초점은 영화가 아닌 박경원의 친일 시비로 옮겨간 뒤였다. 그 순간부터 애국적 대의에 반하는 일체의 시도를 부관참시하는 인터넷이 들끓기 시작했다. 시사회 전부터 비난이 쏟아졌고 급기야 사태는 <청연> 불매 운동으로 번졌다. 잠잘 때도 이불 대신 태극기를 두를 것 같은 애국적 네티즌들은 역사적 평가가 확실히 나지 않은 박경원은 물론, 제작사인 코리아픽쳐스, 윤종찬 감독, 그리고 <청연>을 보고 호감을 가진 관객들까지 역사 의식이 말소된 무뇌아적 친일파로 몰았다. 매카시즘의 악몽을 되살리는 듯한 분위기에서 누구나 친일파가 될 수 있었다. <청연>은 왜곡된 민족주의 담론과 저열한 인터넷 문화가 합작한 안타까운 피해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인터넷 파시즘이 불러온 <청연>의 참담한 결과는 영화의 자체 동력과 무관하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다. 이 영화를 둘러싼 친일 담론의 전개 양상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일본'이라는 주홍 글씨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금기인가를 다시금 확인시키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 핵심을 벗어난 논쟁은 파시즘적 민족중심주의, 인터넷 문화의 역기능, 예술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의 무지함이 빚어낸 합작품일 뿐이다.

<청 연>의 친일 논란에 관한한 인터넷은 정보와 건강한 의견 교환의 공간이 아닌 '파시즘의 바다'였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관객들에게까지 난데없는 사상 검증을 요구하는 게 <청연>을 둘러싸고 벌어진 인터넷 논쟁의 실체였다. <청연>은 친일 행위를 미화하거나 강변하는 선전 선동영화가 아니다. 모름지기 친일 영화라 함은 영화를 본 후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도록 하거나 적어도 일본이 주장하는 가치에 동조하도록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뒤 남는 감정은 절망감뿐이다. 좌절된 꿈에 대한 절망감이든, 삶과 죽음을 오간 기구한 여성의 운명에 대한 절망감이든, 꿈은 언제나 허망하게 끝날 수 있다는 숙명론에서 오는 허무든. 번지수를 잘못 찾은 왜곡된 민족주의의 등살에 밀려 묻히기에 <청연>은 너무 아까운 영화다. 영화를 변호하는 모든 목소리를 친일로 단죄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광풍에 휩싸여 이 영화의 가치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 영화는 예술지상주의에 경도돼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먹은 매국 영화일까?

치어걸 운운하는 그들이 마녀다

외 세 침략으로 고통받던 망국의 시대, '하늘을 날고 싶다'는 염원을 품었던 식민지 신여성의 삶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윤종찬 감독은 지난 3년간 이 같은 질문에 시달렸을 것이다. <소름>으로 작가적 역량을 증명한 윤종찬의 관심은 '박경원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땅에서의 삶보다 하늘에서의 죽음을 택했던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있었다. 박경원은 조선 최초의 민간 여류 비행사이자 신여성이며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욕망으로 들떠 있었던 공상가였다. 윤종찬이 상상하고 장진영이 묘사한 박경원은 그랬다. 무시무시한 일본 제국의 군대를 닌자라고 상상하는 철부지 소녀였고 부엌데기 노릇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맹랑한 꼬마였다. 박경원이 그런 사람이라는 건 이 영화의 전제다. <청연>을 친일로 모는 사람들은 이 같은 전제마저 문제삼는다. <청연>이 친일 영화임을 단정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영화가 박경원이라는 친일 경력이 의심되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사실과 다르게 미화함으로써 왜곡된 역사 인식을 심어주고 심지어 그것에 물들도록 조장한다는 점, 둘째 역사를 정면에서 응시하지 않고 개인의 삶 속에 역사를 투영하는 우회의 방법론을 택했다는 것. 그럼으로써 이 영화가 노리는 것은 시대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 있는 성찰이 아니라 친일 분자의 행적에 대한 회피라는 것.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든 감독은 박경원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음으로써 친일파의 삶을 최소한 방조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 등이다. 이 모두는 <청연>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이며 그것이 얼마나 완결적인 내적 구조를 통해 형상화돼 있는가를 따져본다면 밝혀질 일이다.

먼 저 영화가 박경원의 삶을 미화했다는 것. <청연>은 박경원의 삶을 '미화'한 것이 아니라 '극화'했을 뿐이다. 극화에는 물론 미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청연>이 극적으로 미화한 것이라곤 박경원이 한 남자와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는 것과 일본인 비행사 기베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 따위가 고작이다. 비행대회에서 3등을 했는데 1등으로 고쳐졌다는 것, 이걸 미화라고 할 수 있는가? 재해석 시비는 실존 인물이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특히 유명인사의 삶을 픽션화하는 영화들이 감내해야 할 어려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연> 친일시비는 <그때 그사람들>의 박정희 재현 논란과 묘하게 겹쳐진다. <청연>의 묘사를 미화로 규정 짓는 것은 <그때 그사람들>에서 주검이 된 박정희의 중요한 부위를 모자로 가리는 장면을 명예 훼손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두 가지 묘사는 공히 예술 작품에 용인되는 창작의 허용선을 넘지 않는다. 둘째, 역사가 아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것 역시 억지 주장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든, 역사에 초점을 맞추든, 인간에 초점을 맞추든, 동물에 초점을 맞추든 그건 작가의 선택이다. 그에 부합하는 미학적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있는가를 판단하면 될 일이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를 추궁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셋째 박경원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무신경한 비판이다.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성찰은 없을지 모르나 인간 존재론의 관점에서 성찰은 어떤 영화보다 강렬하다. 비행의 꿈을 위해 일본인 후원자라는 배경이 필요했고 일장기를 들어야 했던 한 여성의 삶을 애국주의적 관점에서만 성찰해야 한다는 당위는 없다.

혹자는 영화가 묘사하고 있듯이 비행을 위해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일본 세도가의 후원을 받기 위해 일장기를 손에 들고 비행을 나간 박경원의 삶이 친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한다.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청연>은 그 모두를 감추지 않는다. 윤종찬은 어떤 이유에서건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일조한 박경원의 삶을 부정하지 않고 묘사한다. 역으로 이런 묘사야말로 이 영화가 친일 혐의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엉뚱하게 친일 논란으로 번진 <청연>에 대한 오독은 예술 작품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동일시하는 오류로 인해 발생했다. 이 같은 오해의 기원에는 박경원이라는 실체적 인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검열의식이 있다. <청연>은 반추해볼 만한 인물의 생애를 재구성하거나 해석을 가하는 전기영화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의 치어걸' 운운하는 비난은 무엇인가? 혹시 댄스홀에서 흥청거리며 춤을 추는 박경원과 한지혁을 보고 던진 말인가? <청연>이라는 영화 어디에도 그 말에 합당한 묘사는 없다.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도그마에 사로잡힌 이들이 진보를 가장한 마녀들이다. <청연>의 친일 규정은 영화적 묘사의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평가를 등가시키는 그릇된 치환에서 발생한 오류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는 픽션을 구성하는 감독의 시선이 역사를 바라보는 한 개인의 시선으로 성급하게 치환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왜곡된 민족주의의 독약

그 러므로 애초 친일 시비에 불을 당긴 인터넷 매체의 한 기자가 '친일의 문제가 한국의 수구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쓴 대목은 틀렸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 혐의는 수구와 진보의 기준마저 무효화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청연>을 친일 영화로 모는 이념적 성향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적 성향을 과장하면서도 특정 이슈에 대해서는(일본이나 친일이 거론되기만 해도) 극렬한 파시즘적 행태를 보이는 왜곡된 민족주의다. 요즘 인터넷 상에서 민족의 이익을 최고의 선으로 과장하는 민족주의는 우리 시대의 화급하고도 윤리적인 임무인 것으로 선전된다. 월드컵이 만들어낸 강한 대한민국의 환상, 황우석 스캔들을 둘러싼 맹목적 애국주의, 정치, 사회와 문화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경직된 친일논쟁 따위에서 이런 병증은 확인된 바다. <청연>의 친일 논란 역시 이런 컨텍스트와 무관치 않다.

<청연>을 둘러싼 역사 해석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론을 재점검해 볼 필요성까지 느끼게 만든다. 굳이 영화를 비롯한 예술 작품이 아니더라도 일제시대와 그 기억을 반추하는 기준이 '친일 대 반일' 또는 '애국 대 매국'의 고정적 이항대립적 구도여야 하는가? 그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거나 빌어오는 예술 작품은 모두 그 기준에 따라 선악을 구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편협한 이항 대립은 마음껏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저 철권 통치 시대의 가혹한 파시즘과 다를 것이 없다. 역대 어느 정권보다 적극적인 일제 잔재에 대한 청산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은 현재형의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탈역사화된 관점만이 예술적으로 우월하며 의미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버리고 취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청연>이 선택은 무엇이었고 그것은 내적으로 공고한가를 따지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구사하고 있는 탈역사화 전략의 목적은 무엇인가? 역사의 실체를 부정하고 회피함으로써 무언가 불순한 노림을 드러내고 그것을 관철시키고 있는가? <청연>은 너무도 확연히 그 용서할 수 없는 선을 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박경원이라는 특정인의 삶에서 색다른 가치와 메시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명백히 그릇된 역사 인식의 부재에서 오는 오류가 아니라면 예술가에게 그쯤의 자유는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대와 인물을 왜곡하고 있다는 누명을 쓰는 것은 '일제'라는 다분히 상징화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는 네티즌이 가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한 이념적 대립에 의해 규정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한 시기였다. 독립투사 아니면 친일파로 모두를 가를 수 있는 그런 물렁한 사회는 분명히 아니었다. 다양한 변인들이 상호작용하는 역동의 역사를 '독립과 친일' '수탈과 핍박'의 대립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단순 상징화이다. 물론 여기에는 수난의 시대를 통과했던 통한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예술 작품에 대한 궤도를 벗어난 비난과 공격이 아무 여과 없이 용인될 수 있는 상황은 이 같은 상징화된 이데올로기의 작용 때문이다.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편협한 이항 분류로 밖에 치부할 수 없는 이러한 관점은 역사뿐 아니라 예술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시대와 인물마저 반민족적 친일파와 애국적 항일투사로 분류해 평가하지 않으면 '미화'의 혐의를 씌우는 편협한 인식론을 확대할 뿐이다.

< 청연> 친일 논쟁이 남긴 또 다른 부작용은 인터넷 공간에서 무성해진 말 부풀리기다. 실존 인물 박경원의 행적을 문제삼았던 이야기가 <청연>의 친일로 등치됐으며 최초의 여류 비행사 논란으로, ‘일본 자금 유입설’로, 친일파 비호론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청연>이 박경원의 삶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드러내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논박하는 글은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다. 친일 비난자들은 영화가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것을 보고 영향을 받게 될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친일 영화라고 규정하는 <청연>은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 영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망상에 동조하거나 또는 암묵적으로 그것을 승인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존을 해치는 일에 가담하는가? 또한 이 영화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그릇된 평가(미화라는 단어에 이러한 함의가 담겨 있다)를 하거나, 혹은 평가를 하지 않으려고 발뺌함으로써 일본에 이익이 되는 부정적 효과를 양산했는가? 보다 본질적으로 역사나 인물에 대해 영화가 평가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 예술 철학의 교시인가? 예술 작품에서 '평가'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이다. 평가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선택의 부분 집합이다. 평가를 하든, 재해석을 하든, 다시 보기를 하든, 아니면 완전히 뒤집어 새로운 관점을 첨가하든 그것은 예술가의 선택이다. 일제 강점의 역사는 유구한 예술 창작의 원리마저 무효로 돌릴 만큼 완고한 기준 하에 묘사돼야 하는가? 영화는 역사책이 아니며 영화감독은 역사학자가 아닐진대, 이미 답이 내려진 평가를 예술가에게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 파시즘의 집단적 때리기에 나타난 맹목적 애국주의는 과거에 대한 탈이념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결코 환영할 만한 현상이 아니다. 윤종찬이 묘사하고자 하는 핵심(이 핵심에 대해서는 이어서 밝히겠다)과는 무관하게 이 영화는 최소한 단세포적 이항 대립의 굴레에 역사를 가두지는 않는다. 혼돈무분의 역사를 통과했던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을 보여 주는 방식도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청연>은 진보적이기까지 하다. 일본인들에게 인정받음으로써 꿈을 이루는 듯했으나 그것이 곧 죽음과 통하게 됐던 인간. <청연>은 친일파 박경원을 미화한 것이 아니라 비극의 삶을 살았던 존재를 무겁게 애도할 뿐이다.

날개가 있는 모든 것은 추락한다

자, 그럼 영화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보자. 일제시대라는 시간적 배경을 거두고 나면 <청연>의 주제는 모호하게까지 보인다. 그 모호함은 박경원의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요,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핵심을 빗나간 친일 논쟁 때문에 보이지 않고 숨어버린 이 영화의 진실이다. 그렇다면 친일 혐의와 매국노 취급을 감내하면서까지 윤종찬이 보여 주고자 했던 '인간 존재의 조건'은 무엇인가?

<청연>이 박경원의 꿈을 보여 준다는 건 절반만 맞는 말이다. 이 영화는 박경원의 꿈보다 더한 좌절, 흡사 '죽음에의 동경'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는 결단을 다룬다. 그러므로 자아를 실현하려 한 의기양양한 신여성의 삶이라는 이 영화의 설정은 현상의 표피일 뿐이다. 이는 윤종찬이 창조한 영화의 구조가 증명하고 있는 바다. <청연>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박경원의 꿈뿐이라면 영화 후반부를 지배하는 어둠과 절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까지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간악한 흉계였다고 매도할 것인가.

명 백하게 <청연>은 두 개의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 동료들과의 끈끈한 우정, 연인과의 달콤한 사랑, 경쟁자마저도 감화시킬 수 있는 그녀의 출중한 실력과 위풍당당함은 이후 박경원이 감당해야 하는 참담한 현실을 더욱 처절하게 만드는 백일몽이다. 선택의 우선 순위를 두자면 박경원의 꿈과 행복은 이후에 올 절망과 추락을 위해 예비된 설정에 불과하다. 수난을 위해 예비된 동료들과의 우정, 진심으로 그녀를 돕는 후원자들, 그리고 달콤한 로맨스까지. 그 천국에서 지옥으로 하강하는 분기점에는 동료 비행사 강세기의 죽음, 연인 한지혁의 죽음이 있다. 사고로 죽은 동료 대신 비행대회에 출전한 박경원은 하늘을 난다는 것이 희열 못지않게 슬픔과 공포를 줄 수 있다는 걸 최초로 느낀다. 산소마저 희박한 4,500m 상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하늘을 선망한 이 여자에게 비행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장면이다. 그 순간 경쟁자인 기베와 벌이는 게임과 같은 공중 랠리나, 놀이기구에 처음 오르는 아이처럼 신났던 처녀 비행의 기억은 죽음을 향해가는 인간이 꾸는 쇠락한 추억의 자리로 물러선다. 박경원이 다치가와 비행학교에서 주최한 전 일본 비행대회에서 우승하는 그 순간까지 영화는 상투적인 러브스토리처럼 보였다.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연인을 만나고 조국을 버리면서까지 하늘을 날고 싶었던 박경원의 꿈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달콤한 백일몽 같았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급속히 추락하는 이미지로 점철된다. 동료의 죽음과 실패한 후원 이벤트, 누명과 고문, 연인의 죽음, 아끼던 동생 이정희와의 의절 등 점점 구석으로 내몰리는 경원은 첫 장거리 비행에서 자살을 암시하는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하늘 위에서의 삶을 묘사하는 장면들에도 변화가 있다. 임박한 파국의 심상을 극대화하는 장진영의 복잡미묘한 표정 연기가 두드러지는 것도 이 때부터고 고통이나 죽음에 관련된 어두운 기억,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이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인물에 대한 윤종찬의 관심이 드러나는 것도 여기서부터다. 꿈이란 그렇게 허망하고 속절없이 꺾일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음과 파멸의 기운이 드리워진 영화의 나머지 절반은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존재한다.

삶과 죽음으로 이분된 두 개의 이야기가 있듯이, <청연>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이미지가 있다. 고도 비행하는 복엽기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순간, 사위가 고요해지는 적요의 이미지가 첫 번째요, 폭우로 지척을 구분할 수 없는 산악 지대를 비행하다 추락하는 푸른 제비호의 폭파 장면에서 재연되는 적요의 이미지가 두 번째다. 주변이 사위어가는 적막,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솟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진공의 대기 속에서 지상의 가치는 종적을 감추고 만다. 비상과 추락의 순간을 동일한 방식으로 시각화한 두 이미지는 <소름>으로부터 이어지는 윤종찬의 영화 세계를 압축한다. <소름>과 <청연>을 이어주는 공통의 연결고리는 바로 ‘애도’의 정감이다. <청연>에서 윤종찬이 관심을 가졌던 건 최초의 장거리 비행을 떠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 한 여성 비행사의 내면이며, 그녀의 최초이자 마지막 장거리 비행이 사고라기보다는 일종의 운명적인 ‘자살’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심증이다. <소름>에서 비극적인 운명의 고리에 얽힌 주인공 용현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근친 상간과 근친 살해를 저지르는 상황에 처한다. 부지불식간에 비극적 행위의 주체가 되고야마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팍팍하기 그지 없는 공기, 이것이 <소름>과 <청연>을 지배하는 아우라이다. <소름>에서 용현과 선영을 파멸로 치닫게 만들었던 것이 허름한 아파트가 상징하는 잔인한 익명성이었다면, <청연>에서 박경원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벗어나려고 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의 공기다. 어려서는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녀였고, 어른이 돼서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 외에 품어본 적이 없는 박경원은, 그토록 자신이 무감했던 시대의 질곡들과 대면하는 순간, 죽음으로 내몰린다. 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계와의 부조화를 통해 윤종찬이 그려내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인물이 아니라, 시대를 벗어나려 했으나 그것에 의해 괴멸돼가는 인물이다. 과거의 상흔, 혹은 치명적인 기억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그들은 그 중심에 놓인 비극을 향해 다가간다. 박경원이 자유로운 영혼을 얻기 위해 하늘을 열망하는 순간, 그녀의 추락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같은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한 조건이 윤종찬이 묘사하는 세계의 진경인 것이다. 끔찍한 기억이 온존하는 아파트에, 가장 돌아오지 말아야 했어야 할 인물들이 어떤 결과가 예비돼 있는 지 모르는 채 돌아오는 것처럼, 경원은 결국 죽음으로 맺음될 수밖에 없는 장거리 비행에 모두를 걸고 매달린다.

사자(死者)의 눈

암 운처럼 드리운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존재의 운명은 이 영화의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죽음을 앞 둔 주인공 구스타프가 열망하는 아름다움(죽음)에 대한 찰나의 매혹을 형상화한 말러의 5번 교향곡은 경원과 지혁의 로맨스가 무르익는 중반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연주된다. 반복되는 음악의 라이트모티프는 그 불가해한 죽음의 운명을 이 영화, <청연>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청연>은 조선인, 일본인, 남자, 여자의 구분이 무의미한 절대적인 고독, 혹은 죽음에 대한 맹목적인 돌진으로 모든 것이 수렴되는 영화이다. 삶과 죽음으로 뚜렷이 갈리는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후자 쪽이다. 영화적 사건이 기술되는 시점 또한 죽음을 맞이한 박경원의 그것이다. 표면적으로 경원의 일대기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과감한 생략 편집은 어떤 감정적 순간들을 위해 기능한다. 내러티브를 따라가기보다는 경원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적 순간들을 포착하는 데 열중하며, 그 와중에 반복되는 비현실적인 설정들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어린 경원은 제국의 군대를 보고 닌자를 상상하고, 자신을 차별하는 아버지에게 분노하며,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비행기에 감탄한다. 다시 말해, <청연>은 오로지 경원의 기억과 회상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그 런 이유로 <청연>이라는 영화 전체는 박경원의 주관적 내레이션을 통해 기술되고 있다. 초반부에 쉼없이 내리는 눈이나, 청명한 밤의 정경,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주인공들의 과도한 낭만성은 객관적인 서술이 아닌 주관적인 회상일 때 가능해 보인다. 로맨스 영화의 상투구처럼 보이는 이 같은 묘사는 박경원의 회상-이미지에 가깝다. 이를 보증하듯 카메라는 때때로 누군가의 시점인 것처럼 움직인다. 박경원이 비행을 위해 원반에 몸을 매달고 구르는 장면의 시작에서 카메라는 마치 그녀와 동반해 굴러가는 것처럼 회전하며, 택시비를 받기 위해 지혁의 집으로 들어가는 경원의 모습도 어떤 '눈'의 시점으로 묘사된다. 때때로 출몰하는 슬로 모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미 죽은 자의 시점, 혹은 죽음을 앞둔 이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회상-이미지인 셈이다. 이러한 심증은 후반부에 경원이 자신의 일기를 읽고, 그 일기를 이정희가 발견하는 장면에서 굳어진다. 한지혁과의 로맨스로 요약되는 과도한 낭만성이 전반부를 채우고 있다면 과도한 고통은 후반부를 압도한다. 졸지에 독립운동가로 오해받은 지혁과 경원이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다소 생뚱맞은 장면은 객관적인 서술의 위치를 벗어나 '고통'만을 위해 삽입된 것처럼 보인다. 윤종찬은 기어이 지혁의 손에서 뽑혀나가는 손톱을 보여 주며, 전기 고문을 당하는 경원의 뒤집혀지는 눈과 입에서 흘러내리는 개거품을 보여 준다. 과도한 행복과 과도한 고통이 경원의 회상 혹은 판타지라면, 경원의 앞에 무시무시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은 죽음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 결국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폭풍우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시 체제가 되면 민간인의 비행 자체가 금지되는 상황 때문에 죽음을 각오한 비행에 나선다. <청연>이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극적 운명에 대한 자각이다.

삶과 죽음의 교차를 전경화하는 것은 또한 영화의 사운드이다. 복엽기의 엔진 소리는 너무도 우렁차서 주변의 모든 소리를 무위로 돌릴 만큼 압도적이다. 털털거리는 복엽기 엔진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반복되는 것은 지축을 집어삼킬 듯한 그 소리의 기세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파묻히는 순간, 경원은 자유함을 얻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소리는 비행을 향한 그녀의 맹목적인 매혹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징표다. 복엽기의 우렁찬 엔진 소리가 생의 의지와 활력을 보여 준다면 경원의 꿈이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두 번의 무음 장면을 통해 보여진다. 비행의 굉음이 이어지다 구름을 뚫고 비상한 순간 열리는 무성(無聲)의 세계. 동료의 죽음과 교차편집되는 경원의 고공 비행에서 더 이상 복엽기의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후반부 충돌하는 경원의 비행기를 보여 주는 장면에서 더 이상 폭풍우와 복엽기의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 박경원이라는 역사적 인물은 세속의 가치와 평가가 유효치 않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든 것이 경원의 회상-이미지였다는 사실은 한지혁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로맨스 플롯의 도구처럼 쓰이는 지혁은 실은 윤종찬이 창조한 가장 야심만만한 캐릭터이고 극중에선 경원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면서 연인이며, 그녀가 만들어낸 분신이고 욕망의 대리자이다. 그는 한때 경원이 품었음직한 일상적 행복에 대한 미련이며(나는 하늘이 좋아/ 난 땅이 좋아라고 주고받는 연인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번민하는 경원에게 하늘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는 내면의 목소리다. 그리고 그 내면의 목소리가 효력을 다하자 지혁은 죽음을 맞고 경원은 그의 유골함을 들고 죽음을 향한 최후 비행에 나선다. 내면의 목소리와 욕망이 이미 죽음에 이르렀음으로 이제 남는 것은 껍데기 뿐인 육신의 죽음이다.

절대 미에 홀린 인간의 운명

시 대와 존재의 운명에 질식당한 여성을 추도하는 이 영화가, 수십 년 뒤 또 다른 시대 공기의 압박에 스러졌다는 것은 기묘한 아이러니다. 그러나 <청연>은 친일 감정을 조장하지 않고, 친일파의 행적을 합리화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죽음으로 화하는 절대 미(美)에 도취된 인간의 존재론적 운명을 다룬다. 하여 <청연>의 죄를 논하려면 그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가 지나쳤다거나 터무니없이 의미를 부풀렸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편이 옳다. 하늘이든, 땅이든, 무엇이든, 아름다운 대상에 홀리는 것은 생의 증거이자 존재의 이유다. 굳이 따지자면 친일이 의심되는 실존 인물을 다뤘다는 것 외에 친일의 굴레를 질 필요가 전혀 없었던 이 영화는 역사적 실체를 의미심장한 관념의 경지로 승화시킨 야심작이었다. 그러므로 <청연>이 시대를 담고 있다는 것은 오해다. <청연> 같은 영화가 시대의 아픔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철지난 오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박경원의 추모비 앞에서 그녀를 애도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다시 한번 애도의 영화로 거듭나는 이 순간, 윤종찬이 보여 주려는 것은 '제국주의의 치어걸'이었던 친일파 박경원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꿈이 죽음으로 변모하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받아들인 인간을 기리는 애도이기 때문이다.
장병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