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을 읽다.

열대어

새봄나라에서살던시원한바람 2006. 2. 21. 23:06

<열대어>

요시다 슈이치저/김춘미 역

문학동네

2003년 10월

248면














치사토는 어린애같이 재채기를 한다.
'헵슝' 글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다.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빈캔에 '헵슝'이라고 써놓고는 혼자 흐뭇해했다.
치사토는 "지금 굉장히 즐겁거든. 부탁이야, 만나러 와줘"와 같은 제멋대로인 소리를 한다.
지금까지 "지금 굉장히 쓸쓸하거든. 부탁이야. 만나줄래?"라고 말하는 여자는 있었지만,
즐거우니까 지금 바로 만나러 와줘, 라고 한 것은 치사토가 처음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유리잔과 얼음을 들고 와서 남은 버번을 부었다.
소파에 앉은 그녀는 가능한 한 나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 앞에 놓인 테이블을 밀어내고, 일부러 그녀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버번이 든 잔에 서로의 입술이 닿을 정도의 거리이다.
"머야?"
팩 중인 그녀는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했다.
"뭐, 별로."
"하고 지픈 애기가 있으면 부명히 마하라고."
"그러니까 없다니까."
"나는 잇더! 산만금 하고 시분 이야지가 잇더!" 정직하게, 뎐부 말하고 짚다고!"
나는 유리잔의 버번을 다 마시고 나서 "너까지도, 정직하게....라니"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잘못돼떠?"
"들어줘도 되지만, 돈 받을 테야. 정직하게 말하고 싶으면 이제부터 돈을 내도록 하자."
"언마?"
보통은 '어째서?'라고 되묻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설마하니 '얼마?'라고 되물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금액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야 내용에 따라 다르지. 중대한 일을 고백하고 싶을 경우에는 비싸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싸게 해주지."

- 그린피스 (green peas) 中

고백이란 편한 거라고 닛타는 생각한다.

들고 있는 패를 보여주고 나머지는 모두 상대방에게 맡긴다.

고백은 비겁하다.고도 닛타는 생각한다. 패배를 인정하고 그뒤는 상대방의 정에 매달리린다.

고백은 버릇이된다. 드러내고 나면 모든것이 끝났다고 낙관한다.

그러나 세상이란 그렇게 어수룩한 놈들만 있는 곳이 아니다.

손안의 패는 이용당하고, 패배자로 취급되고, 끝나기는커녕 등을 떼밀려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너무 비관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닛타는 피부로 느긴다.

아무리 비싸도 비관론을 사라.

속으면 안된다.

원래 낙관론이란 공짜인 것이다, 라고.


"저, 닛타, 공항에서 며칠이고 마중 나올 사람을 기다리던 외국인 얘기 알아?"
"나리타 공항의 대합실에서 말이죠? 뉴스에 나오는 걸 봤어요. 며칠이고 며칠이고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공항 사람들이 동정해서 먹을 것도 주고 샤워도 하게 해주고 했다죠?"
"맞아. 그 사람 정말로 누군가와 약속을 했던 것일까?"
"네?"
"그러니까, 정말 누군가가 오기로 되어 있던 걸까?"
"그야 그렇겠죠, 약속하지 않았으면 안 기다릴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나는 그 뉴스를 보면서 기다린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겠구나 생각했어.
보고 있으니까 나까지 슬퍼지고 말이지.
그렇지만 보고 있는 사이에 '사실은 이 사람 아무하고도 약속 같은거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구.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기뻐져서, 뭐가 기쁜지 나도 알 수 없지만, 나리타 공항의 벤치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어져서....."
"가셨어요?"
"설마."
"그렇겠죠. 그런데 그 외국인 어떻게 됐을까요? 역시 단념하고 돌아갔을까요?"
"그렇겠지. 체념할 수 밖에 없잖아."
"나는 말이죠, 누가 기다려주는 게 질색이에요. 애인과 만나기로 했는데 일 때문에 늦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삼십 분쯤 지나버려서 이제는 없겠지 생각하고 가보면 거기에 그냥 있는거예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뭐랄까, 소름이 끼친다니까요. 원래 같으면 감격해야 할 텐데 아무리 좋아하는 여자라도 소름이 끼쳐버리거든요."

- 돌풍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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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라는 일본 작가의 단편 세 편을 묶은 소설집.

어렵지 않은 말로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문체가 자연스럽고 읽기에 편하다.

재미있다.